송사(宋词)/宋词 辛弃疾

永遇乐·京口北固亭怀古(영우락, 찡커우의 북고정*을 회고하다)

charmingryu 2017. 8. 18. 17:46
 
千古江山英雄无觅孙仲谋处。舞榭歌台,风流总被雨打风吹去。斜阳草树,寻常巷陌,人道寄奴曾住。想当年,金戈铁马气吞万里如虎

元嘉草草,封狼居胥,赢得仓皇北顾。四十三年,望中犹记,烽火扬州路。可堪回首,佛狸祠下,一片神鸦社鼓。凭谁问,廉颇老矣,尚能饭否?

 

강산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건만

영웅 손중모(孙仲谋)는 찾을 길 없네. 

화려했던 궁전과

호걸들의 풍류 비바람과 함께 흘러갔어라.

석양 중에 보이는 초목

좁디좁은 길거리들

기노(寄奴)*가 여기서 살았다는구나.

당시를 돌이켜 보니

장창 차고 철마에 올라

성난 호랑이같이 만 리를 삼켰었네*. 

 

원가(元嘉)*는 경솔하게 

랑쥐쉬(狼居胥)*에서 제사를 올리려다

창황히 북쪽을 관망했어야 했네*.

43년 전*을

돌이켜 보면

양저우 곳곳에 불길이 타올랐었지. 

차마 떠울리고 싶지 않으니

불리사(佛狸祠)* 아래에서

제삿밥 먹는 까마귀들 사당 북소리에 장단을 맞춤이라.

누구에게 물어볼까

나이 든 염포(廉颇) 장군*

여전히 식욕 왕성한지 

 

1) 징커우는 삼국시대 손권(孙权, 자는 중모仲谋)이 지금의 장쑤 전장(镇江)에 설치한 도성. 징셴산(京岘山)과 인접하고 장강 어귀에 위치하여 생긴 이름. 북고정은 진(晋)의 채모(蔡谟)가 베이구산(北固山)에 세웠던 정자로 북쪽으로 장강을 바라본다고 하여 북고정(北顾亭)이라고 하기도 하였음.

2) 남조 시대 송 무제(宋武帝) 유유(刘裕)의 어릴 적 이름.

3) 유유는 두 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하여 뤄양, 장안 등지를 수복함.

4) 남조 송 무제의 아들 문제 유의륭(文帝刘义隆)의 아들. 성급한 상격에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철저한 준비 없이 3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하였으나 실패. 특히 3번째 북벌에서는 북위(北魏) 탁발도(拓跋焘)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장강까지 밀리게 되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음.

5) 네이멍구 자치구 서북부에 있는 산 이름. BC 119년(한 무제 원수元狩 4년)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여 7만여 적군을 섬멸한 뒤 이 산위에 단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하면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축하하게 됨. 남조 송 문제가 왕현모(王玄谟)의 3번째 북벌 계획을 듣고 랑쥐쉬(狼居胥)에서 제사를 올릴 계책이라고 칭찬하였음.

6) 북위가 반격하여 양저우(扬州)까지 이르자 송 문제는 크게 놀라 졘캉 모푸산(建康幕府山)에 올라 북쪽의 형세를 관망하였음.

7) 신기질이 1162년(고종 소흥 32년) 양저우에서 금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던 때부터 1205년(영종 개희宁宗开禧 원년) 전장지부(镇江知府)에 임명되어 북고정(北固亭)에 올라 이 사를 쓰기까지의 세월.

8) 450년(원가 27년) 탁발도는 남조 송의 왕현모 군을 반격하여 두 달여 만에 5개 방향으로 창강 북안까지 남하해서 과부산(瓜步山)에 행궁을 세웠는데 이를 사람들이 탁발도의 아명을 따서 불리사(佛狸祠)라고 부름. 남송 시기에는 유래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불리사를 신명께 제사 올리는 사당으로 사용하게 됨.

9) 전국 시대 조(赵)나라의 명장 염포는 직위를 박탈 당한 후 위(魏)나라로 피신. 조나라 왕이 다시 등용할 수 있을지 사자를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염포는 여전히 식사로 쌀밥 한 말, 고기 열 근을 먹으며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곤 하였으나 염포의 적인 곽개(郭开)가 사자를 회유하여 염포는 다시 등용되지 못함. 한탁주는 신기질의 방책을 거부하고 북벌 전날 그의 직책을 박탈함. 

 

 

▶ 1205년(영종 개희宁宗开禧 원년), 신기질 66세 되던 해 당시 실권자 한탁주(韩侂胄)가 북벌을 계획하며 한직에 있던 신기질을 다시 기용하여 요충지 징커우의 수비를 맡김. 한탁주는 표면적으로 그를 중용하는 척하면서 얼굴마담으로만 활용하다 축출함. 징커우의 북고정에서 이 지역 출신들의 역사적 인물들을 빌려 자신의 헌신 의지와 철저한 준비 없이 무모하게 추진되는 북벌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나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