昆曲/桃花扇·哀江南

북신수령(北新水令)

charmingryu 2025. 2. 7. 12:32

山松野草花挑,猛抬秣陵重残军废垒,瘦马卧空壕;村郭萧条,城着夕道。

 

산의 소나무와 들의 풀, 꽃을 꽂고 장작을 지고 걷던 중

문득 머리를 들어 보니 또다시 무링(秣陵)1)에 이르렀네

허물어진 요새엔 아직 패잔병이 주둔하며

여윈 말들은 황량한 해자에 누웠구나

마을 주변을 스산함이 감싸고

성은 석양 비치는 길을 마주하고 있네

 

1)    난징의 진, () 때 이름.

 

북신수령은 북곡 쌍조에 속하는 곡패로 극곡과 산곡 투수(散曲套)에서 사용됨. 통상 투수의 머릿곡으로 쓰이며 역사적 근원이 원나라 때까지 소급됨.

강남을 슬퍼하다(哀江南)’는 공상임() 작품 도화선(桃花扇)의 마지막 장인 속 사십 출, 여운(四十出 余韵) 중 끝부분으로 남명이 멸망한 뒤 소곤생(昆生)이 난징을 유랑하며 보고 겪은 처참한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흥망성쇠의 허무함, 망국의 아픔, 망해 버린 고국에 대한 애도를 표현.

 

공상임(, 1648~1718)

 

자는 빙지(聘之) 또는 계중(季重), 호는 동당(). 산둥 취푸(曲阜) 출신이며 공자의 64세 손으로 어릴 때부터 예(), (), (), () 등의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악률을 고증하면서 희곡 창작의 기초를 다짐. 젊을 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684년 강희제가 공자 묘에 참배할 때 경전 강의를 계기로 국자감 박사(博士)로 발탁됨. 발탁 전까지의 기간에 도화선(桃花扇)’, ‘소홀례 이야기(小忽雷)’, ‘대홀례(大忽雷)’ 등을 저술함. 홍승과 더불어 강희 때 문단의 쌍벽을 이루러 남홍북공(南洪北孔)이라고 불림.

 

도화선(桃花扇) 개요

 

공상임이 1699년 완성하고 1708(강희 47)에 초판 발행. 명나라 말기 난징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함. 후방역(侯方域)과 이향군(李香君)의 만나고 헤어짐을 주제로 명나라 말기 난징의 현실을 묘사하는 동시에 홍광(弘光,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1645 잔존 세력에 의해 립된 황제) 정권이 패망한 원인을 진단하고 국가에 대한 충절을 꺾지 않았던 영웅 백성 기개 노래하면서 망국의 아픔을 드러냄. 세부적인 부분에 문학적인 가공을 가미하였으나 중대 사건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

명 사종 숭정(明思宗) 말년 명말 사공자(明末四公子) 중 한 사람인 후방역(1618~1654)은 난징에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무처우(莫愁) 호수 변에서 지내던 중 양용우(杨龙)의 소개로 이향군(李香君)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고 시를 적은 부채를 증표로 줌. 당시 난징에 은거하고 있던 위충현(魏忠)의 잔당 완대성(阮大)이 후방역의 곤궁한 사정을 알고 그를 회유하여 복사(, 명나라 말기 강남의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정치, 문학단체. 숭정] 2년에 쑤저우 인산州尹山에서 장부와 장채가 주도하여 설립하고 조정과 사회의 개혁을 주장)에 접근하기 위해 양용우를 통해 거금을 넣은 화장품 상자를 보내었으나 이향군이 정색을 하면서 돌려보냄. 이 일로 완대성은 후방역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됨. 이자성(李自成)이 난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하자 마사영(士英)과 완대성이 난징에서 복왕(福王)을 옹립하여 연호를 홍광(弘光)이라 하고 전권을 휘두르면서 복사() 관련 인사들을 철저히 배제함. 그때 우창(武昌)을 지키던 닝난후 좌량옥(宁南侯左良玉)이 간신 척결을 부르짖으며 난징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자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짐. 원래 좌량옥은 후방역의 아버지에 의해 발탁되었으므로 후방역이 편지를 보내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완대성이 오히려 반군과 내통하였다는 모함을 하고 후방역은 양저우로 피신하여 사가법(史可法)의 군 참모가 됨. 완대성이 이향군을 핍박하여 조운 책임자인 전앙(田仰)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이향군은 죽기로 반항하다 증표로 받은 부채에 피를 흘림. 이후 양용우가 부채의 핏자국으로 도화도(桃花)만듬. 완대성이 마사영(士英)을 상심정(心亭)의 설경 감상에 초대하고 기생을 선발하자 이향군은 이를 통렬하게 비난하였으나 결국 궁궐로 뽑혀가게 되면서 소곤생(昆生)에게 도화선을 맡기며 후방역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함. 후방역은 난징으로 돌아와 수소문하던 중 완대성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됨. 청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난징을 공격하자 홍광은 도주하고 후방역은 감옥을 나와 치샤산(栖霞山)으로 피신하였다 백운암(白云庵)에서 이향군과 상봉한 뒤 장 도사(道士)의 깨우침으로 두 사람 모두 출가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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