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宋词)/송사 周密

瑶花慢·朱钿宝玦(요화만, 붉은 보석 옥 패물)

charmingryu 2022. 11. 24. 13:16
后土之花,天下无二本。方其初开,帅臣以金瓶飞骑,进之天上,间亦分致贵邸。余客辇下,有以一枝(下缺)。
 
朱钿宝玦,天上飞琼,比人间春别。江南江北,曾未见、漫拟梨云梅雪。淮山春晚,问谁识、芳心高洁?消几番、花落花开,老了玉关豪杰。
金壶剪送琼枝,看一骑红尘,香度瑶阙。韶华正好,应自喜、初识长安蜂蝶。杜郎老矣,想旧事花须能说。记少年一梦扬州,二十四桥明月
 
후토사(后土祠)*의 꽃은 천하에 둘도 없는 꽃으로 개화하면 사신(帅臣)*이 금병에 넣고 황궁으로 나는 듯이 달려 고관들의 집으로 나누어 주었으므로 내가 손으로 있던 황성에도 가지 하나가 있게 되었다.(이하 분실)*
 
붉은 보석이요 옥 패물이로다

천상의 비경(飞琼)*인가

인간 세상 봄이 비할 바 아니구나

강남과 강북 어디서도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함부로 구름 속 배꽃이나 눈 속 매화에 견주면 안 될 일이다.
화이산(淮山)*에 봄이 깊었으니
아가씨 고결한 마음씨를
누가 아는지 물어보리라.
꽃 떨어지고 꽃 피는 것이
몇 번씩 거듭되어
변방의 호걸들 늙어 버렸네.
 
경화 가지 잘라서 금병에 담아 보내니
달리는 말이 일으키는 먼지를 보게
향기가 황궁까지 보내지네.
아름다운 봄 풍경 정말 좋구나
꽃 자신도 응당 기뻐하리니
장안의 벌과 나비들 처음 알게 됨이라.
두목(杜牧)도 이미 늙어
옛일을 회상하면
꽃이 능히 이야기하리라.
소년의 때를 기억하노니
꿈같았던 양저우 생활
이십사교(二十四桥)* 다리에 달이 밝았었네.

 

1. 후토사는 양저우에 있는 대지의 신을 모신 사당.

2 송나라 때 각 방면 안무사(安抚司)의 장관으로 이후 최고 통솔자를 뜻하게 됨.

3. 원래 백오십 자에 달하는 서문이 있었으나 단지 1/4만 남아 전함.

4. 서왕무의 천하절색 시녀 허비경(许飞琼). 

5. 쉬이쥔(盱眙军)의 두량산(都梁山), 남송의 북쪽 국경 화이수이(淮水) 옆에 있음.

6. 서호에 다리가 24개 있었다는 설과 홍약교(红药桥) 위에서 24명의 미인들이 피리를 불러 이십사교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설이 있음.

 

▶ 도종 함순(度宗咸淳, 1265~1274년) 연간의 작품. 당시는 재상 가사도(贾似道) 치하의 정치적 암흑기였음. 1259년(이종 개경开庆 원년) 송나라 군대가 패하자 가사도는 몽골과 굴욕적인 화의를 위하여 영토를 할양하기로 함. 몽골군이 철군하자 가사도는 대승으로 거짓 보고하여 포상을 받음. 함순 초 몽골이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여 샹양(襄阳), 판청(樊城)을 포위 공격하면서 정세가 위급하게 되었으나 도종은 주색에 빠져 전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묻지도 상관도 하지 않음. 가사도는 급변하는 상황을 감추고 서호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매일 주연을 열었음. 이 사는 당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함.

요화(瑶华)는 굴원(屈原)의 '구가, 대사명(九歌·大司命) 중 "승마(升麻)의 예쁜 꽃을 꺾어서, 멀리 떠난 님에게 보내리(折疏麻兮瑶华,将以遗兮离居。)”에서 제목을 취함. 오문영이 처음 사를 썼고 주밀이 정체를 확립함.

 

주밀(周密, 1232~1298年 또는 1308年)

 

자는 공근(公谨), 호는 초창(草窗), 소재(霄斋), 빈주(蘋洲), 소재(萧斋) 등이었다 만년에는 변양노인(弁阳老人), 사수잠부(四水潜夫), 화부주산인(华不注山人)으로 바꿈. 우싱(吴兴, 지금의 저장 후저우湖州) 출신. 오대에 걸친 관리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주진(周晋)이 죽은 뒤 문음(门荫, 조상의 연줄로 관직에 특채되는 일)으로 관직에 들어섰으나 1263년(경정景定 4년) 재상 가사도(贾似道)의 미움을 사 사직함. 이후 도종 함순 연간(度宗咸淳, 1265~1274년)에 복귀하여 송말 우이령(义乌令)을 맡았다가 원나라가 들어선 이후 관직에 나서지 않고 저술 활동에 전념함. 오문영(호 몽창梦窗)과 함께 이창(二窗)이라고 불림. 초창구사(草窗旧事), 빈주어적보(萍洲渔笛谱) 등에 많은 시와 사가 남아 있으며 절묘호사전(绝妙好词笺)을 편집하여 백여명의 사를 수록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