凉州词(량저우)
其一
黄河远上白云间,一片孤城万仞山。
羌笛何须怨杨柳,春风不度玉门关。
저 멀리 황하는 흰구름 사이에서 흘러 나오고
외로운 성 하나 만길 높이 산 위에 솟아 있네.
구태여 강족 피리로 구슬픈 양류(杨柳)* 불지 않아도 되리니
봄바람이 옥문관(玉门关)까지 불어 올 일 없음이라.
* 양류(杨柳):절양류(折杨柳)를 말하며 고대 시문에서는 버드나무가 이별을 상징하였음.
* 옥문관(玉门关):한 무제가 설치한 관문. 서역에서 수입하는 옥이 이 문을 통과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 원래 지금의 간쑤성 둔황 서북쪽의 소방반성(小方盘城)에 있었으나, 육조(六朝) 시대에 지금의 안시 솽타바오(安西双塔堡) 부근으로 이전하였음.
其二
单于北望拂云堆,杀马登坛祭几回。
汉家天子今神武,不肯和亲归去来。
선우(单于)가 북쪽을 바라보니 불운퇴(拂云堆)*로구나
거기서 말을 잡아 제를 올리고 당과 싸운 것이 몇번이었던가
이제는 영명하고 위풍당당한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니
화친(和亲)*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구나.
* 불운퇴(拂云堆):내몽골자치구 서부의 우위안(五原)에 있던 사당.
* 현종 개원 연간(713~741)에 돌궐의 선우 소살증(小杀曾)이 현종의 아들 됨을 청하고 공주와 결혼하기를 희망하였으나 현종은 그를 아들로 삼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공주를 주는 것은 거절함.
726년 왕지환이 벼슬을 그만두고 15년간 자유인으로 살 때 쓴 시. 설용약(薛用弱)은 집이기(集异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김. "왕지환은 고적(高适), 왕창렬과 요정에서 술을 마시다 이원(梨园)의 가수들의 연회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누구의 시가 가장 인기가 있나 시험헤 보기로 하였다. 가수들이 왕창령의 시는 두수, 고적의 시는 한수를 불렀으나 왕지환의 시는 아무도 부르지 않다가 그 중 가장 예쁜 가수가 위 시중 첫번째 수를 부르자 왕지환이 아주 득의양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