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唐诗)/元稹

遣悲怀(아픈 가슴 달래며)

charmingryu 2021. 3. 30. 16:30

其一

 

谢公最小偏怜女,嫁与黔娄百事乖。

顾我无衣搜画箧,泥他沽酒拔金钗。

野蔬充膳甘长藿,落叶添薪仰古槐。

今日俸钱过十万,与君营奠复营斋。

 

사공(谢公)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당신이*

가난한 검루(黔娄)*와 결혼하여 온갖 고생 당했구려.

남편 옷 한 벌 장만코자 바구니를 뒤져가며

굳이 금비녀를 뽑아 술 뒷바라지 감당터니

쓰디 쓴 들나물로 맛있는척 허기를 채우면서

낙엽 긁어 땔감이요 마른 홰나무로 밥을 지었는데

오늘에야 봉록이 십만전을 넘었건만

해 줄 것이라곤 제삿상과 극락왕생 비는 것이군요. 

 

* 동진(东晋) 재상 사안(谢安)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조카 사도운(谢道韫)에 부인 위총을 비유.

* 검루(黔娄):전국시대 제(齐)나라의 은둔자. 극도로 가난하여 죽었을 때 시체를 덮을 옷이 없었음. 명문세가의 규수인 위총이 눈높이를 낮추어 자신에게 시집 왔음을 의미.

 

其二

 

昔日戏言身后意,今朝都到眼前来。

衣裳已施行看尽,针线犹存未忍开。

尚想旧情怜婢仆,也曾因梦送钱财。

诚知此恨人人有,贫贱夫妻百事哀。

 

오래전 죽고 난 뒷 수습을 농담삼아 말하더니

오늘 아침 모든 것이 눈 앞에 벌어졌구려.

그대 입던 옷은 이미 나누어 줄 곳에 다 주었지만

아직 갖고 있는 반짓고리 통, 차마 열지를 못하겠소.

돌이켜보면 항상 노비들을 가련이 여겼길래

몇번이고 꿈에 의지하여 지전을 태워 보냈다오.

사람마다 사별의 아픔 지닌 것이 절실히 느껴지나

가난했던 부부, 고생했던 옛일들이 안타깝기 그지 없소.

 

其三

 

闲坐悲君亦自悲,百年都是几多时。

邓攸无子寻知命,潘岳悼亡犹费词。

同穴窅冥何所望,他生缘会更难期。

惟将终夜长开眼,报答平生未展眉。

 

하릴없이 앉아 그대를 아파하고 나를 탄식하니

순식간의 백년 세월 계속되고 계속되리.

등유(邓攸)*는 무자식이 운명의 정함인 줄 깨달았고

반악(潘岳)*의 죽은 부인 애도시는 공연한 글 낭비라.

한 무덤에 합장한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며

저 세상에서 다시 맺어짐은 허황된 바람일뿐

그저 두 눈을 뜨고 온 밤을 지새워 그리워함이

평생 미간을 펴지 못했던 당신에 대한 보답이요.

 

* 등유(邓攸):서진(西晋) 때 허시(河西)태수. 훌륭한 인품에도 불구하고 종신토록 자식이 없었음.

* 반악(潘岳):서진 때의 문학가. 부인과 사별하고 애도시 삼수(悼亡诗三首)를 씀.

 

 

원진(元稹)의 부인 위총(韦丛)은 태자소보(太子少保) 위하경(韦夏卿)의 막내딸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음. 802년(德宗贞元十八年) 20세 때 아직 미관말직이던 25세의 원진과 결혼.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였고 부부 금슬이 좋았음. 7년이 지나고 원진이 감찰어사(监察御史)를 맡고 있을 때 위총이 27세의 나이로 병사함. 원진은 아픈 마음을 금할 길 없어 적지 않은 애도시를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연작시임.

 

원진(元稹, 779 ~ 831)

 

자는 미지(微之)이며 허내이(지금의 허난 뤄양) 출신. 793년(德宗贞元九年) 명경과(明经科)에 급제하고 감찰어사를 지냈으나 환관들과 수구세력에게 미움을 사 배척됨, 이후 환관의 도움으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书门下平章事)로 복귀하였다가 우창군절도사(武昌军节度使) 임지에서 사망. 백거이와 가까이 지내며 신악부운동을 추진하여 원백(元白)이라고 불림. 문장의 기교에 치중하여 "원은 가볍고 백은 속되다(元轻白俗)"라는 말이 있음. 원씨장경집(元氏长庆集) 60권과 보유(补遗) 6권, 830여 수의 시가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