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宋词)/宋词 姜夔

扬州慢·淮左名都(양주만, 화이허 왼쪽 이름난 도시)

charmingryu 2017. 11. 24. 08:49
淳熙丙申至日,予过维扬。夜雪初霁,荠麦弥望。入其城,则四顾萧条,寒水自碧,暮色渐起,戍角悲吟。予怀怆然,感慨今昔,因自度此曲。千岩老人以为有“黍离”之悲也
 
淮左名都,竹西佳处,解鞍少驻初程。过春风十里,尽荠麦青青。自胡马窥江去后,废池乔木,犹厌言兵。渐黄昏,清角吹寒,都在空城。
杜郎俊赏,算而今重到须惊。纵豆蔻词工,青楼梦好,难赋深情。二十四桥仍在,波心荡、冷月无声。念桥边红药,年年知为谁生。
 
순희(淳熙) 병신년(丙申年) 동짓날, 내가 웨이양(维扬)*을 지날 때  야설(夜雪)이 그치면서 온통 보이는 것은 냉이와 보리 천지였다. 성에 들어가니 사방이 적막하고 차가운 냇물은 푸르른데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군대 나팔소리가 애절하게 울리는 것이 마음을 울리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여 이 곡을 지었다. 천암노인(千岩老人)*도 이 사에 서리(黍离)*의 아픔이 있다고 하였다.
 
화이허(淮河) 왼쪽의 이름난 도시 
죽서정(竹西亭)* 아름다운 곳에서 
안장을 풀고 잠깐 쉬고자 하니 이번이 첫 여행길일세。
봄바람 십 리 길을 지나니
온 천지가 냉이와 보리로 푸르고 푸르다.
오랑캐 말들이 장강을 휩쓸고 간 뒤*
황폐해진 연못과 고목들만 남아
지금도 그때의 참상 입에 담기 어렵구나。
점차 황혼에 접어들어
처량한 나팔소리 찬 공기 일깨우니
이 모두 황량한 성의 일이라
 
두목(杜牧)이 걸출한 글을 남겼지만*
지금 다시 와 본다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으리
'두구(豆蔻)'의 문장 미려하기 그지없고*
청루의 꿈 또한 걸작이긴 하나*
이렇게 착잡한 심정은 글로 쓰기 어려우리
이십사교(二十四桥) 아직도 있으나
물살은 드세고
차가운 달빛 아무런 말이 없네.
다리 옆 붉은 작약꽃아*
해마다 누굴 위해 봉오리를 맺는 것이냐

 

1) 장쑤 양저우

2) 소덕조(萧德藻)의 호. 강기와 함께 시 공부를 했으며 강기는 그의 조카사위이기도 함.

3) '시경 왕풍(诗经·王风)'의 편명(篇名). 주 평왕(周平王)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주대부(周大夫)가 서주의 옛 도읍을 지나다 종묘는 허물어지고 기장만이 수북이 자란 것을 보고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이 시를 씀. 이후 서리는 고국 생각을 뜻하는 말이 됨.

4) 양저우 북문 바깥에 있는 명승지. 

5) 1129년(고종 건염 3년)과 1161년(고종 소흥 31년) 두 차례에 걸쳐 금나라 군대가 양저우를 침범.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

6) 833년에서 835년 사이(당 문종 대화唐文宗大和 7년에서 9년) 두목은 양저우에서 화이난 절도사 장서기(淮南节度使掌书记)를 지냈음.

7) 두목의 시 '증별(赠别)' 중 "하늘거리는 자태의 십삼여 세, 이월 초 두구 가지 끝이로다.娉娉袅袅十三余,豆蔻梢头二月初。)”의 인용. 두구는 열서너 살 아름다운 소녀의 상징.

8) 두목의 시 '회상(遣怀)" 중 " 양저우 십 년의 꿈 깨어보니, 남은 것이라곤 청루의 박정하단 이름뿐일세(十年一觉扬州梦,赢得青楼薄幸名。)”의 인용.

9) 양저우 성 안에 있는 오나라 때의 벽돌 다리. 홍약교(红药桥)라고도 부름.

10) 양저우가 번화하던 시기 홍작약으로 유명하였음.

 
 
▶   1161년(고종 소흥 31년) 금나라 황제 완안량(完颜亮)의 군대가 남침하여 장강 주변을 초토화. 1176년(효종 순희 3년) 동지 20여 세의 강기가 양쩌우를 지나면서 전쟁 후 복구되지 않은 상태로 버려진 참상을 목도, 옛 영화롭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 곡을 짓고 가사를 씀.